역사의 구경꾼으로 남지 않기 위하여

 

- S. I. -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관계없이 젊고 똑똑한 관료들을 뽑아서 규장각에 배치했는데, 이것이 바로 초계문신 제도입니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사람 중 37세 이하의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하는 거예요. 개혁 정치를 함께하기 위해 재교육을 한 것이지요. 초계문신의 대표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입니다.(P68)

  정약용은 정조의 편지를 받고 물러납니다. 자신의 생가에 여유당이라고 쓰인 현판을 걸어 놓았습니다. “여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정약용은 매일 현판을 쳐다보면서 오늘 하루도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해야지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P71)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나라를 탓하고 운명을 탓하며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하더라도 쉽게 손가락질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18년 동안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씁니다.(P73)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가문이 몰락한 상황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금방 나아질 거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폐족일지라도 선비의 기상을 유지하는 길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폐족에서 벗어나 청족이 되려면 오직 독서 한 가지 일뿐이다라고 했지요. 청족은 대대로 절개와 의리를 숭상해온 집안을 뜻하는 말입니다.

  정약용은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조인이 되었다고,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여 손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의 평가를 받으려 했습니다.(P75) 정약용은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죄인의 입장이지만 역사는 자신을 그렇게 기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쓰고, 또 썼던 것입니다. 교과서를 한번 펼쳐보세요. 정약용이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까? 죄인 정약용? 아닙니다.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기록되어 있어요. 정약용이 남긴 수많은 저서는 현대에도 활발히 연구되며, 학자는 물론 일반인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정약용이 200년 전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죠.(P76)